지금 생각해도 참 희한한 일인데, 제가 196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김수근 연구소에 가고 싶다며 찾아갔어요. 당시에 윤승중 실장님이 제 이력을 보니까 뽑고 싶은데, 여기 자리가 없으니까 딴 데 가서 취업해서 좀 있으면 자기가 김수근 선생한테 얘기해서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셨어요. 당시 김수근 연구소가 안국동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인원이 8명이었어요. 그 얘기 듣고 제가 두 달인가 어디 다른 선배 사무실에 가서 일했어요. 1965년 2월에 졸업식을 하고는 그러니까 그해 한 4월엔가 김수근 사무실에 입사한 거예요
막상 들어가서 보니 일을 안 시키는 거예요. 새로 들어온 놈한테 무슨 일을 시키겠어요. 처음에 지적도 확대를 시켰데, 그런 건 서울공대에서는 안 해봤단 말이에요. 잘 못하니까 누가 와서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렇듯 처음에는 일을 잘 시키지도 않고, 시킨 일도 잘 못하고, 그냥 제도판 하나만 들고 하루 종일 빈둥거릴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저는 그곳에서 정말 좋은 책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건축 관련 책이 우리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너무 귀했거든요. 교수들 강의도 진짜 책이 아니고 따로 인쇄한 것을 나눠줘서 그걸로 매일 공부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사실 건축책은 사진과 도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나중에 건축 사무실을 차리면서 출판사까지 함께 차린 이유가 후배들한테 책 굶주림을 해소해 주고 싶어서였어요. 아무튼 그렇게 책이 귀한 시대였는데, 김수근 선생은 일본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책이 정말 많은 거예요. 일본 책도 있고 다른 좋은 원서도 많았어요. 제가 맨날 거기서 책만 들여다봤어요. 그 모습을 김수근 선생이 잘 봤나 봐요. 이놈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싶었던 거죠.
마침 1966년부터 엑스포 67 설계를 사무실에서 시작했는데, 그걸 저한테 맡긴 이유는 이놈이 책을 많이 보는 놈이기도 하고, 조직위원회에서 영어로 편지가 오는데 읽을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읽고 답을 보내야 되는데 제가 그 사람들 중에는 영어를 좀 하는 편이었으니까, 편지가 오면 읽고 이거 무슨 뜻이다, 답장을 보내고, 언제까지 뭐를 해라, 뭐를 제출해라, 하면 그대로 했어요. 말하자면 처음에 설계 담당자가 아니라 편지 수발 담당으로 뽑혔어요.
우리 명령 체계가 우선 김수근 선생, 그 밑에 설계 실장이 있었어요. 윤승중 건축가가 설계 실장이었는데, 어시스턴트로서는 아주 최고인 분이었습니다. 윤승중 건축가는 제 대학교 5년 선배인데 굉장히 훌륭한 참모예요. 그러니까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김수근 선생한테는 정말로 필요한 존재였죠.
프로젝트에 들어간 건 그분이 저를 잘 봐서도 있지만, 사실 그놈의 편지 때문이었는데, 어떨 때는 불어로 편지가 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시 몬트리올 퀘벡 주에 세파라티스트(separatist)라고 분리주의자가 있었어요. 분리주의자들은 캐나다에서 불어를 쓰는 구역을 독립시키자, 우리는 영국 식민지였던 것이 싫다고 힘을 모았던 사람들이었죠. 그 세력의 중심지가 몬트리올이었던 거예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불어 편지가 오니까 언어 소통에 좀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마침 제가 대학원 시험을 치느라고 불어 공부를 좀 했으니까 편지가 오면 우선 저한테 가져오는 거죠. 조직위원회에서 보낸 내용을 읽고, 답을 이렇게 보내라고 지시를 받으면 제가 더듬더듬 타자를 치면서 편지를 썼어요. 아마 문장이 엉터리였을 텐데 알아들었으니까 답장이 오고 또 보내고 그랬겠죠. 그래서 처음에는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통신병 역할로 들어갔다가 설계 담당까지 된 거예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너무너무 다른 일로 바빴기 때문이기도 했을 거예요. 김수근 선생에게 천만다행이랄까 아님 저한텐 천만다행이랄까, 너무 큰 프로젝트가 많아서 엑스포 67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저한테 그 프로젝트를 맡겨놓고는 마치 조그마한 주택 디자인 하나 맡겨놓은 듯이, “그건 잘돼가?” 하면서 가끔 물었어요. 그럼 제가 가서 진척 사항을 보여드렸죠. 그러면 늘 “오케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싸 이거 내 맘대로 해도 되는구나’ 싶었죠. 이거 고쳐라, 저거 이렇게 해라 같은 잔소리를 들었으면 짜증났을 텐데, 가져가면 무조건 오케이니까 오히려 한번 신나게 풀어본 거예요.
한국 정부가 세계 엑스포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을 때였어요. 김중업 선생이 뉴욕박람회에서 맨 처음 한국관을 연 적이 있고 그전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파빌리온을 제대로 지은 건 엑스포 67이 아마 처음이었을 거예요. 당시 군사 정부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엑스포 조직위원회에 참가 신청을 낼 것이냐 말 것인지, 청와대에서조차 이걸 돈 들여서 참여할 가치가 있는지 공방이 오갔다고 해요. 그러다가 우리도 한번 참여해보자고 내린 결정이 굉장히 늦었던 거죠. 어느 부서에서 담당할지도 결정이 안 되어서 일이 겉돌았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 상공부가 담당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상공부에서는 ‘우리는 이런 쪽 잘 모릅니다’라고 해서 결국 지금도 있는 코트라(KOTRA, Korea Trade-Investment Promotion Agency), 즉 무역진흥공사(현: 대한문역투자진흥공사)가 담당했죠. 이게 개관이 얼마 안 남았는데 설계하고 시공하고 언제 다 하느냐며 난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캐나다가 워낙 먼 곳이니까 상상도 잘 안 되던 시절이었죠.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담당자를 잘 만났어요. 부서명이 확실치 않지만 당시 코트라에 전시과인가 그 과장님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젠틀하고 스마트한 분이었는데, 둘이 죽이 잘 맞아서 클라이언트와 설계 실무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친분이 생기게 되었어요. 그분은 코트라 무역진흥공사 실무자니까 해외 경험이 많아서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주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