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건축 역사, 그중에서 근현대 건축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몬트리올 엑스포 67의 한국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당시 몬트리올 한인회 회장님에게 연락을 받고서였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한국에 올 일 있을 때 한국에서 뵌 적도 있고요.
그런 인연으로 제가 뉴욕에 김종성 교수를 만나러 갔던 해 겨울에, 아마도 2014년 12월이나 2015년 1월경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때 몬트리올을 방문했는데, 눈이 굉장히 많이 쌓여 있었고 몹시 추웠습니다. 거기서 한인 회장님을 만나서 한국관의 현장을 확인하며 스케치하듯 둘러보았습니다. 아울러 당시 한인 사회와 캐나다 몬트리올시의 계획과 동향, 분위기도 한번 살펴봤습니다.
현장을 먼저 살펴본 다음에 제가 내부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을 한번 짚어봤습니다. 한국의 원로 건축가들에게 다시 한번 상황을 파악하기도 했고요. 저는 실제로 이 복원 프로젝트가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2015년 8월에 문화재 보수업체를 운영하면서 저랑 같이 근대도시건축연구회에 함께 활동하고 있는 고주원 대표님한테 상황을 이야기했어요. 이러한 일이 있는데, 현장에 같이 가볼 생각이 없느냐고 여쭤봤죠. 물론 다 자비로 가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분도 이런 쪽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시는 분이었거든요. 결국 함께 가서 한인회 회장님과 당시 몬트리올 총영사도 만났어요. 총영사관은 전체 한인회와 한국 정부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으로, 당시 총영사는 허 씨 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관련 진척 상황을 들었어요.
그러고는 제가 도코모모 인터내셔널 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맺었던 마르스텔라 카시아토라는 분이 계신데요. 당시 CCA의 디렉터로 계셨기 때문에, 그분한테 CCA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협조 요청해서 받았습니다. 그다음에는 몬트리올의 도코모모 퀘백의 대표로 있는 프란치스 반과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한 여성 건축가와도 만나서 그분을 통해서 장 드라포 공원의 관계자들도 만났죠. 덕분에 저는 여러 자료를 많이 구해서 전체 상황을 알게 되었어요. 또한 한국관 재정비를 진행할 때 한인회가 해야 할 역할을 함께 논의하기도 했죠.
당시에 눈이 굉장히 많이 와서 저는 겨울옷을 입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거기 사람들이 보기에는 추워 보였던 것 같아요. 같이 갔던 한인 회장님은 캐나다인들이 겨울철을 날 때 입는 두툼한 겉옷을 입고 계셨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관을 처음 봤을 때는 바깥에 이렇게 울타리를 쳐놓고, 내부는 못 들어가고 밖에서만 볼 수 있었어요. 바로 옆에 탑이 쓰러진 채로 있더군요. 탑에 덮여 있던 눈을 치우면서 아주 간략한 간이 실측을 하고 스케치를 했습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 모습을 봤다면 아 너무 처참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저 정도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어요. 예전에 한국관의 디자인을 진행하셨던 건축가 김원 선생님에게 엑스포가 끝나고 남길 건축물로 한국관이 선정되어서, 거기에 필요한 서류 절차를 진행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무려 1967년의 일이잖아요. 벌써 50년이 거의 지난 상황인데, 이 정도로 남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솔직히 가슴 벅찬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관을 잘 보존해서 계속 남아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우리나라가 1900년 파리 엑스포에서 최초로 한국관을 만든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동북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참가해서 각각의 독립적인 파빌리온을 세웠어요. 자국의 건축 양식에 기초해서 만든 3개국의 파빌리온 중에서 중국과 일본 파빌리온은 벨기에의 브뤼셀로 옮겨가서 현재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관은 남아 있지 않거든요.
그런데 몬트리올 67에서는, 그러니까 그로부터 67년이 흐른 다음에는 중국관과 일본관은 당연히 참가했을 텐데 남아 있지 않고, 우리 관만 남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약간의 민족주의적인 감정도 일어나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동시에 한국관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남겨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다른 하나는 제가 건축 역사학자다 보니까 가지는 생각인데, 그 건축물에는 분명히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무조건 김수근 선생 작품이라거나 무조건 우리나라 건물이기 때문에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요.
사실은 김수근 선생님이 현장을 보고 내용을 공유하면서 추후 작업에 영향을 준 부분은 별로 없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윤승중 선생은 이것을 설계하고 일이 너무 바빴고, 김원 선생은 현장에 가고 싶었지만 못 갔죠. 공간 직원 중에 유학 이민을 가고 싶었던 분이 가면서 엑스포 프로젝트는 이후에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적으로 오사카 엑스포를 할 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한번 생각해 볼 것은 오사카 엑스포를 할 때도 우리 정부에서 한국적인 디자인을 하라는 요구가 굉장히 강했다고 들었어요.
개최국이 일본이기 때문에 민족 감정이 투영되어 거북선 같은 거를 만들라는 지시가 실제로 내려왔다고 하죠.
그런데 이때 방향을 틀었잖아요. 우리나라가 1970년이 되면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오사카 엑스포뿐만 아니라 미래의 비전에 대한 콘텐츠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실제로 그 준비를 같이했으니 이런 변화는 분명히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