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캐나다 정부가 바라보는 관점인데요. 1962년 소련이 철수하면서 입찰에 실패한 캐나다 정부가 재빨리 다른 계획을 세우고, 그해 11월 실행에 옮깁니다. 당시 장 드라포는 향후 25년 동안 집권하게 될 매우 패기 넘치는 몬트리올 시장이었습니다. 그는 몬트리올을 국제도시로 만들 기회이자 현대화의 순간으로 엑스포 67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도시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기 위한 방법으로 도시 재개발을 모색하고 있던 참이었죠. 이게 바로 기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정부의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건축가 친구들의 시선입니다. 1962년 여름에 샌디 반 긴켈과 블랑쉬 반 긴켈이 이끄는 몬트리올의 건축가 그룹은 커피를 마시며 비공식 회의를 연달아 가졌습니다. 그들은 퇴근 후에 만나서 앞으로 몬트리올에 어떤 변화가 펼쳐질지 상상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세계라는 시대정신을 알아보았습니다. 당시 몬트리올은 현대화되고 있었고, 캐나다 정부는 도시 재개발에 전념했으며, 슬럼가 정비를 위해서 연방 정부의 자금이 투입되고 있었어요. 그들은 미래에 몬트리올에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국제 박람회를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베를린의 IBA처럼 현대적인 대규모 주택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엑스포67이 1960년대 프로젝트가 아니라 1950년대 프로젝트라는 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 참전했거나 전쟁 중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부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2차 세계대전에 가장 많이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악몽으로 매우 강력한 휴머니즘적인 생각을 하며, 이와 관련된 국제주의 정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정학적 변화에 대해서도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엔과 유네스코, 무엇보다 1959년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남극이 국제적인 지역이 되는 놀라운 사건을 계기로 마치 지구물리학의 해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었어요. 이와 함께 탈식민지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몬트리올의 도시 계획가인 클로드 로빌라르입니다. 그는 매우 트인 진보적인 엔지니어입니다. 훌륭한 문필가이기도 하고요. “자신의 세계 속의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장본인이에요. 이 구호는 프랑스 비행가이자 소설가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문구로, 소설은 인간이 자연의 강력한 힘을 극복하는 동시에 지구의 힘에 경외심을 갖는다는 매우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즉, 당시 건축가들은 비정치적인 세계주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 시대의 가장 진보적인 세계주의자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건축가들은 1962년 캐나다 건축센터의 소장품인 ‘맨 인 더 시티’ 모델을 제작했습니다. 이 모델은 교통망으로 연결되어 몬트리올 도시를 재창조하는 일종의 여러 대규모 도시 재개발 지휘대 네트워크 다이어그램입니다. 그것은 현재 다른 모든 건축에서 쓰이고 말하고 토론되고 읽히는 유일한 건축 양식입니다. 정말 근본적인 아이디어였죠. 그 아이디어의 세계가 1963년 마스터플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CIAM의 초기에 팀10 멤버이자 네덜란드 아방가르드 출신으로 알도바닉의 절친한 친구인 다니엘 반 긴켈이 샌디와 함께 엑스포 67의 수석 기획자가 됩니다.
선생님과 전시와 연구를 통해 한국관에 대해 알게 된 흥미로운 인터뷰 하나가 있습니다. 당시 젊은 건축가였던 수석 디자이너가 안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는 필립 존슨의 글래스하우스에서 한국관을 상상했다는 놀라운 일화였습니다. 이 젊은 건축가는 당시 전 세계에 퍼져 있던 국제 모더니즘의 심오한 이미지를 목조 건축의 한국적 감성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행크의 한국식 해석과 조인트와 브래킷의 많은 핸들링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한국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다른 파빌리온의 맥락과 견주어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한국관은 현대적인가, 현대적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 불확실한 작품인가? 역사주의와 현대의 모방인가? 아마도 한국인은 그 시기에 해외여행을 하지 않았을 테고, 그런데 한국에 가본 적이 없는 외국 관객을 위해 한국의 정체성을 현대적 관용구로 재해석한 것인가? 예를 들어 1960년대까지 서구의식에 깊숙이 침투한 일본과 달리 다른 아시아 국가는 굉장히 폐쇄적이었습니다. 두 나라를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일본이 사다리꼴의 큰 건축물을 지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 건축의 우아한 재해석으로 읽는다는 재미있는 비교가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과는 다른 진영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도와 비교해 볼 만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는 역사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유사 현대식 건축물을 짓습니다. 사암을 사용하고, 머글과 힌두교 건축을 일종의 현대적 스타일로 다시 혼합합니다.
인도는 당시 영국으로부터 탈식민지화된 지 20년 밖에 되지 않아 매우 현대적인 국가의 내생적 문명 또는 고대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한국은 1945년부터 제국주의 이후 탈식민지화, 그다음에 남북전쟁이 있었고, 분단이 되었죠. 인도와 비슷한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전통과 현대가 섞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지만 전통과 현대의 혼합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관의 특성을 불확정적이라고 부르는데, 어느 한쪽으로만 읽어도 안 되고, 양쪽 모두로 읽어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것과는 다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인도계 비평가들 중 많은 사람이 국가 참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을 배출한 르 코르뷔지에의 교훈이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왜 하드엣지 모더니즘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분노했습니다. 왜 자국내 박람회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치적 혼란을 표현하는 온건한 모방에 의존해야 하는가라고 말했죠. 그들은 이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났어요.
그리고 많은 국가에서 토착 건축을 현대적인 분위기로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리브해 국가들도 그러한데, 탈식민지화라는 맥락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태국과 같은 역사주의자나 일본처럼 근대주의자인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별개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국은 1940년대 중후반의 기술 과학적 근대성을 채택하거나 적응한 근대화 국가들에서 탈식민지화한 모델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신의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언어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몇몇 국가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런 행보는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